조제프 조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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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제프 조프르는 프랑스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프랑스 육군 최고사령관을 역임했다. 1852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청불 전쟁, 프랑스령 수단, 마다가스카르 등에서 군사적 공적을 세워 빠르게 승진했으며, 1911년 프랑스 육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의 막대한 피해와 정치적 갈등으로 1916년 해임되었다. 이후 미국에 파병을 촉구하는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1918년 최고전쟁평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평가받으며, 여러 국가에서 훈장을 수여받았다. 193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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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조프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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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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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52년 1월 12일 |
사망일 | 1931년 1월 3일 |
출생지 | 리브잘트, 프랑스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국적 | 프랑스 |
배우자 | 결혼: 아멜리 푸르셰이루 (1873년 10월 11일 – 1874년 4월 2일, 사망) 결혼: 앙리에트 페농 (1905년 4월 26일) |
부모 | 어머니: 카트린 플라스 아버지: 질 조제프 펠릭스 조프르 |
모교 | 에콜 폴리테크니크 |
소속 | 제2제국 제3공화국 |
군 종류 | 프랑스 육군 기병 |
복무 기간 | 1869년–1916년 |
최종 계급 | 대장 |
별명 | 파파 조프르 |
경력 | |
주요 지휘 | 제19 포병 여단 제6 보병 사단 제2 군단 |
주요 전투 | 보불전쟁 파리 공방전 청불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국경 전투 제1차 마른 전투 바다로의 경주 제1차 아르투아 전투 제1차 샹파뉴 전투 제2차 이프르 전투 제2차 아르투아 전투 제2차 샹파뉴 전투 베르됭 전투 솜 전투 |
프랑스군 참모총장 | |
임기 시작 | 1911년 7월 29일 |
임기 종료 | 1916년 12월 14일 |
이전 | 오귀스탱 뒤바이 |
이후 | 로베르 니벨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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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 | |
약장 |
2. 초기 생애 및 경력
조제프 조프르는 1852년 프랑스 남부 피레네오리앙탈주의 리브잘트(Rivesaltes)에서 포도원을 소유한 포도주 통 제조업자 가정에서 태어났다.[101][5] 그는 카탈루냐인 혈통이었으며, 카탈루냐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다.[101] 어린 시절부터 성실한 학생으로 수학, 기술 기하학,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5]
1870년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에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5] 같은 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젊은 포병 소위로서 파리 포위 공격에 참전하며 첫 실전 경험을 쌓았다.[5] 전쟁 후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추가 교육을 받고 공병(génie)으로 전과했다.[5] 이후 대위로 진급(1876년)할 때까지 파리 성벽 재건축과 몽트리니옹(Montlhéry) 요새 건설 등에 참여했다.
이후 조프르는 공병 장교로서 프랑스 식민지에서 오랜 기간 복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청불 전쟁(1884-1885) 기간에는 타이완의 keelung 원정에서 활약했으며,[5] 이후 프랑스령 수단(1892년 전속)에서는 팀북투 원정을 지휘하며 군사적 공적을 세웠다.[6] 또한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조제프 갈리에니(Joseph Gallieni) 장군 휘하에서 복무하며 디에고 수아레스(현 안치라나나) 요새 건설을 담당했다.[7] 이러한 식민지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소령(1888년), 중령(1894년), 준장 등으로 빠르게 승진했다.[6][7] (자세한 군 경력은 하위 '주요 군 경력' 표 참고)
1903년 프랑스로 돌아와 제19기병여단장을 시작으로 육군성 공병국장(1904년), 제6보병사단장(1906년, 중장 진급), 육군사관학교 감찰관(1907년), 제2군단장(1908년)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103][104] 1910년에는 최고전쟁평의회(Conseil supérieur de la guerre) 위원으로 임명되어 독일과의 전쟁 준비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1911년 7월, 전쟁부 장관 아돌프 메시미(Adolphe Messimy)는 군 최고 사령부 개편을 단행했다. 기존의 방어적 전략을 주장하던 빅토르-콘스탕 미셸(Victor-Constant Michel) 장군이 해임되면서, 참모총장과 최고사령관 지명자(최고전쟁평의회 부의장) 직책이 통합되었다. 이 새로운 최고위직에 갈리에니와 폴 폴(Paul Pau)이 먼저 제안받았으나 거절했고, 결국 갈리에니의 추천 등으로 조프르가 임명되었다.[8][105] 당시 조프르는 군대를 직접 지휘해 본 경험이 거의 없고 참모 업무에도 익숙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10][107]
최고 사령관이 된 조프르는 군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등이 고안한 공격적인 전쟁 계획인 제17계획(Plan XVII)을 채택했다.[9] 이 계획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독일에 빼앗긴 알자스-로렌 지역 탈환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또한 그는 1913년 3년 징병제를 도입하여 군비 증강에 힘썼다. 1914년 총선에서 좌파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해 가을 모리스 사라유(Maurice Sarrail)로 교체될 예정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무산되었다.[11]
2. 1. 주요 군 경력
연도 | 계급/직책 | 주요 활동 및 내용 | 출처 |
---|---|---|---|
1870년 | 소위 (포병 장교) |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파리 포위 공격 참전 | [5] |
1871년 | 공병 전속 | 에콜 폴리테크니크 추가 훈련 후 공병대(génie)로 전속 | [5] |
1872년 | 중위 | 파리 성벽 재건축 및 몽트리니옹(Montlhéry) 요새 건설 참여 | |
1876년 | 대위 | 승진 | |
1884년~1885년 | (계급 불명) | 청불 전쟁 기간 동안 타이완 keelung 원정에서 활약, 타이완 주둔 (1885년) | [5] |
1888년 | 소령 | 승진 | |
1892년 | 소령 | 프랑스령 수단 전속. 말리의 세구(Ségou)에서 팀북투까지 부대 지휘, 보니에(Bonnier) 중령 유해 회수, 투아레그족과의 교전 및 노획[6] | [6] |
1894년 | 중령 | 수단에서의 공로로 승진 | [6] |
1895년 | 중령 | 마다가스카르에서 조제프 갈리에니 장군 휘하 복무, 디에고 수아레스(현 안치라나나) 요새 담당 | [7] |
(시기 불명) | 준장 | 마다가스카르 복무 중 승진 | [7] |
1901년 | 소장 | 승진[103][104] | [103][104] |
1903년 | 소장 | 뱅센 제19기병여단장 임명 | |
1904년 | 소장 | 육군성 공병국장 임명 | |
1906년 | 중장 | 파리 제6보병사단장 임명, 중장으로 승진[103][104] | [103][104] |
1907년 | 중장 | 육군사관학교 감찰관 역임 | |
1908년 | 중장 | 아미앵 제2군단 지휘관 임명 | |
1910년 | 중장 | 최고전쟁평의회(Conseil supérieur de la guerre) 위원 임명, 대독 전쟁 작전 수립 관여 | |
1911년 | 중장 | 프랑스 육군 참모총장 겸 최고사령관 지명자 임명 (빅토르-콘스탕 미셸 해임 후)[8], 갈리에니 장군 추천 | [8][105] |
1913년 | 중장 | 3년 징병제 도입 | |
1914년 | 중장 | 대독 군사 계획 제17계획(Plan XVII) 도입,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 수훈 |
1911년, 조제프 갈리에니 장군의 추천을 받아 프랑스 육군 최고사령관 겸 총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당시 최고사령관직과 총참모장직으로 나뉘어 있던 군 지휘 체계를 통합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조프르는 취임 이후 프랑스 육군의 개혁을 추진하고, 분산되었던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는 데 힘썼다. 또한 독일의 군비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1913년에는 징병제 복무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법안 통과를 주도하여 프랑스의 군사력 강화를 도모했다.
3. 프랑스 육군 최고사령관 (1911-1916)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조프르는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서 전쟁 초기 작전을 지휘했다. 국경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으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며 파리를 방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전쟁이 참호전 양상으로 장기화되면서, 그의 공세 위주 전략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낳았고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특히 1916년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의 끔찍한 소모전은 그의 군사적 명성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계속되는 군사적 난항과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1916년 12월 최고사령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3. 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초기 전투 (1914)
전쟁 발발 당시 프랑스의 작전 계획은 독일의 슐리펜 계획과 충돌하며 프랑스군에 큰 손실을 안겼다. 8월 15일 벨기에 뫼즈 강의 디낭에서 독일 기병대가 발견되었고, 샤를 랑레작 휘하 제5군의 반복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프르는 독일 주력 부대가 벨기에를 통과할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다.[12] 8월 18일, 그는 최대 15개의 독일 군단이 벨기에를 통과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지만(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다), 이들 중 일부만이 뫼즈 강 서쪽으로 진출할 것이며 영국군과 벨기에군에 의해 저지될 수 있다고 오판했다. 그는 프랑스 제3군과 제4군에게 아르덴 지역 공격을 준비시키는 한편, 랑레작의 제5군에게는 독일 우익 측면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13]
그러나 조프르의 예상과 달리 전황은 불리하게 흘러갔다. 8월 19일과 20일, 프랑스 제1군과 제2군은 알자스-로렌 지역으로 공세를 펼쳤으나 독일군의 반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14] 조프르는 리에주 요새가 함락된 사실(8월 16일)을 뒤늦게 알았고,[15] 벨기에 브뤼셀이 독일에 점령된(8월 20일) 상황에서도 아르덴 지역의 독일 중앙군이 약할 것이라는 믿음을 유지했다.[16] 8월 21일에는 프랑스 제2군이 독일군의 반격을 받았고, 카스텔노 장군이 낭시 포기를 건의했으나 조프르는 이를 불허했다.[17]
같은 시기 프랑스 제3군과 제4군이 아르덴 지역으로 공격을 시작했지만, 독일 폰 뷜로의 제2군이 랑레작의 제5군을 공격하며 뫼즈 강에 교두보를 확보했다.[18] 제5군은 독일 제3군에게 우익마저 공격당했고, 랑레작은 후퇴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19] 8월 23일, 제5군은 다시 독일군의 공세를 받았다.[20]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프르는 8월 23일 아돌프 메시미 전쟁장관에게 제4군이 아르덴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잘못) 보고했다. 그는 현장의 패배 보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공세를 재개할 것을 명령하며, 실패한 장교들의 해임을 요구했다.[21] 메시미 장관은 조프르의 강경한 조치를 지지했다.[22]
계속되는 후퇴 속에서 조프르는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8월 25일, 그는 참모장 베르테로 장군의 조언을 거부하고 모리스 가믈랭 소령에게 아미앵 지역에 프랑스군을 집결시키는 계획 수립을 지시했는데, 이는 나중에 미셸 조제프 모누리 장군이 지휘하는 제6군의 창설로 이어졌다.[23][24] 또한, 랑레작에게 지속적으로 반격을 명령하며 압박했고,[25] 제4군과 제5군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페르디낭 포슈 장군 지휘 하에 새로운 제9군을 창설하도록 지시했다.[26]
조프르는 기즈 전투(8월 29일)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랑레작의 지휘를 감독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조프르는 랑레작의 지휘에 만족감을 표했다.[27] 이 전투의 결과로 폰 클루크가 이끄는 독일 제1군은 파리 외곽으로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28] 이러한 독일군의 움직임은 이후 제1차 마른 전투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8월 30일 조프르는 프랑스 정부에 파리 철수를 권고했고,[32] 9월 3일에는 후퇴 과정에서 소극적이었던 랑레작을 해임하고 더 공격적인 루이 프랑셰 데스페레로 교체했다.[38]
3. 1. 1. 마른 전투 (1914년 9월)
8월 말, 프랑스군은 계속 후퇴하고 있었고, 조프르는 아미앵 근처에 모리스 가믈랭 소령의 계획에 따라 새로운 제6군을 창설하여 미셸 조제프 모누리 장군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 부대는 처음에는 아미앵 근처에 집결했다가 파리 방향으로 후퇴했다(8월 26일).[23][24]
한편, 파리 방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아돌프 메시미 전쟁장관은 8월 25일 조프르에게 파리 방어를 위해 현역 군단 3개를 제공하라고 명령했지만, 조프르는 이를 전략에 대한 간섭으로 여기고 무시했다. 8월 27일, 새로 임명된 전쟁장관 알렉상드르 밀레랑은 파리 방어 상태를 논의하기 위해 조프르를 방문했고, 조프르는 모누리의 공격이 실패할 경우 파리에 군단 3개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29][30][31]
8월 30일, 조프르는 프랑스 정부에 보르도로 철수할 것을 권고했다.[32] 9월 1일, 혼란 속에 앵 강을 넘어 후퇴한 제5군의 상황을 고려하여, 조프르는 "제4호 일반 명령서"를 발령했다. 이 명령은 모누리의 제6군을 파리 군사 총독 조제프 갈리에니의 지휘 아래 두고, 영국 원정군(BEF)과 제5군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루이 코노 지휘 하에 새로운 기병 군단을 창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조프르는 제5군이 독일 우익 내부를 향해 서쪽으로 공격해야 한다는 기존의 생각을 유지하고 있었다.[33]
9월 2일, 세당 전투 기념일에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떠나 보르도로 이전했다. 같은 날 조프르는 모누리를 "파리 군대"로서 갈리에니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두었고, 밀레랑 장관에게 갈리에니를 자신의 지휘 아래 두도록 요청했다.[34][35][36] 조프르는 센 강 남쪽까지 후퇴한 후 반격할 계획이었으며, 대략 9월 8일경 "파리와 베르됭의 뿔 사이"에서 결전을 예상했다.[37] 그는 9월 3일 오후, 랑레작 장군을 해임하고 더 공격적인 성향의 루이 프랑셰 데스페레 장군으로 교체했다.[38]
상황은 9월 3일 밤에서 4일 사이에 급변했다. 파리의 항공 정찰을 통해 클루크가 지휘하는 독일 제1군이 파리를 우회하여 남동쪽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가 확인되었다. 이를 파악한 갈리에니는 9월 4일 오전, 조프르에게 연락하여 즉각적인 반격을 제안했다. 갈리에니는 독일군의 진격 속도에 따라 9월 6일에 마른 강 북쪽에서 공격하거나, 9월 7일에 마른 강 남쪽에서 공격하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40][41][42] 조프르는 처음에 제6군이 마른 강 남쪽으로 건너가 공격하는 방안을 선호했으나, 갈리에니는 이미 제6군이 북쪽에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영국군 참모부와의 조율도 진행 중이었다.[43][44][45][46]
프랑셰 데스페레 역시 9월 6일 공격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보내왔다. 여러 상황을 종합하고 갈리에니와의 통화 끝에, 조프르는 최종적으로 연합군 총공세를 9월 6일로 앞당기고, 제6군이 마른 강 북쪽에서 공격하도록 결정했다. 이는 그의 초기 계획과는 다른 결정이었지만, 전황 변화에 따른 유연한 대응으로 볼 수 있다. 오후 10시, 조프르는 연합군 총공세를 명령하는 "제6호 일반 명령서"를 발령했다.[47][48][49][50] 이 결정은 제1차 마른 전투의 시작을 알렸고, 독일군의 파리 진격을 저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른 전투 중, 조프르의 권위적인 일면이 드러나기도 했다. 9월 7일, 그는 레이몽 푸앵카레 대통령 등 정부와 직접 소통해 온 갈리에니에게 더 이상 정부와 직접 연락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당시 많은 장군들을 해임하며 군권을 장악해가던 조프르가 잠재적 경쟁자인 갈리에니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51] 실제로 1914년 12월에는 갈리에니가 조프르를 대신할 총사령관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52]
3. 2. 참호전과 정치적 갈등 (1915-1916)
마른 전투 이후 서부 전선은 길고 지루한 참호전 양상으로 굳어졌다. 조프르는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계획하고 실행했지만, 견고한 독일군의 방어선을 뚫는 데는 번번이 실패했다. 1915년 봄, 조프르는 아르투아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며 "4월 말까지 공격 준비를 마치고 적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며, "3개월 안에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자신하기도 했다.[54] 그러나 이러한 공세들은 막대한 인명 피해만 남긴 채 별다른 전략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군사 작전의 난항과 더불어 조프르는 정치권과의 갈등에도 직면했다. 1915년 1월 7일, 푸앵카레 대통령은 프랑셰 데스페레, 갈리에니, 법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 등이 제안한 살로니카 원정 계획을 지지했다. 이들은 살로니카 원정을 통해 먼저 터키, 그 다음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전쟁에서 이탈시켜 독일을 고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조프르는 서부 전선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 계획에 반대하며 정치 지도자들과 마찰을 빚었다.[53] 이러한 군사적 실패와 정치적 입지 약화는 이후 조프르의 지휘권 상실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서부 전선에서의 소모적인 참호전은 1916년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끔찍한 희생을 안겨주며 절정에 달하게 된다.
3. 2. 1.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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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해임과 그 이후 (1916-1931)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에서의 막대한 피해와 정치적 갈등은 조프르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1915년 가을부터 에밀 드리앙 대령 등은 조프르가 베르됭 요새의 방비를 소홀히 한다고 비판했고, 이는 전쟁장관 갈리에니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60][61][62][63] 갈리에니는 조프르의 작전 지휘권에 문제를 제기하며 정치권과 조프르 사이의 긴장을 높였다.[56][57][58][59]
1916년 12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 함락과 솜 전투의 실망스러운 결과는 조프르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더욱 가중시켰다.[72] 브리앙 총리는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조프르를 실권이 없는 명예직으로 옮기려 했다.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진행된 의회 비공개 회의를 거쳐, 브리앙은 조프르에게 프랑스 원수 직위를 제안하며 정부의 기술 고문 역할을 맡기기로 했다.[72]
1916년 12월 13일, 브리앙은 새 내각을 구성하면서 조프르를 "프랑스군 총사령관 겸 정부 기술 자문관 겸 전쟁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임명했지만, 실질적인 군 지휘권은 로베르 니벨에게 넘어갔다.[9][73] 조프르는 이 조치가 당초 약속과 다르다며 불만을 표했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그러나 곧 자신에게 실질적인 권한이 없음을 깨닫고, 프랑스 원수로 공식 승진한 1916년 12월 26일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여전히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 최초의 원수였다.[9]
해임 후 조프르는 외교 및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17년 4월,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알렉상드르 리보 총리는 조프르를 르네 비비아니와 함께 미국 특사단에 파견했다.[74] 조프르는 워싱턴 D.C.에서 미국 의회 연설을 하고 행정부 인사들과 만나 미군 부대의 조속한 프랑스 파병과 군수 물자 지원을 성공적으로 요청했다.[75][76] 그는 미국 동부를 순회하며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가 등을 방문하고 대중의 큰 환영을 받았다.[77] 그의 노력은 미국 제1보병사단의 프랑스 파병 결정에 기여했으며, 새로 임명된 미국 원정군(AEF) 사령관 존 J. 퍼싱 장군과 만나 협력을 약속했다.[77][78] 7월 4일에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열린 미군 환영 행진을 푸앵카레 대통령과 함께 사열했다.[80]
1918년에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 역할을 한 최고전쟁평의회(Supreme War Council) 의장을 맡았다.[82] 같은 해 미국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82] 1919년 공식적으로 은퇴한 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Académie française) 회원[83] 및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명예 국제 회원으로 선출되었다.[84] 1920년에는 자신의 출신지인 프랑스령 카탈루냐와의 인연으로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카탈루냐어 문학 경연대회 '플로랄 게임(Jocs Florals)'을 주재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성대한 환영 퍼레이드를 받았다.
4. 유산 및 평가
조제프 조프르는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인물로 평가받는 동시에, 막대한 인명 손실을 초래한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마른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의 주요 공적으로 꼽히며, 위기 상황에서의 침착함과 결단력[93]은 높이 평가받는다.[94][95] 영국 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 역시 그를 긍정적으로 보았다.[90]
그러나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 등에서의 막대한 희생[66]과 초기 방어 준비 미흡[60][61][62] 등은 그의 군사적 한계로 지적된다. 이러한 군사적 문제와 정치적 압력[56][68][72] 속에서 그는 1916년 말 사실상 지휘권을 잃고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며 일선에서 물러났다.[9][73]
위베르 리오테 장군은 조프르가 전략가보다는 군수 장교로서 더 뛰어났다고 평가했다.[92] 그는 평소 과묵하고 침착했지만 때때로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으며[90], 1875년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이력이 있다.[86][87][88]
4. 1.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서 마른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 연합국의 전쟁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군대를 재편성하고 독일군의 초기 공세를 막아낸 점[94], 그리고 실패한 지휘관들을 과감히 교체하며 군의 효율성을 높이려 한 점[93] 등은 그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는 부분이다.그러나 전쟁 초기 제17계획에 따른 공세 실패와 이후 베르됭 전투, 솜 전투 등에서 막대한 인명 손실을 초래한 소모전 방식은 그의 전략적 한계와 과오로 지적된다.[66][60][61][62] 특히 베르됭 요새의 방어 준비를 소홀히 하여 초기에 독일군에게 큰 진격을 허용한 점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60][61][62] 이러한 군사적 실패와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그는 1916년 말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9][73]
한편, 조프르의 군 경력은 프랑스 제국주의 시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는 청불 전쟁 참전을 시작으로 말리, 마다가스카르 등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지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았다.[6][7] 특히 말리에서는 현지 부족과의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가축을 노획하는 등[6], 당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적 경험을 가진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이러한 식민지에서의 행적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역할과는 별개로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조제프 조프르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격동의 시기에 프랑스를 이끈 중요한 군사 지도자였으나, 그의 군사적 공과와 함께 제국주의 시대 군인으로서의 행적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평가해야 할 인물이다.
5. 수상 내역
::슈발리에 – 1885년 9월 7일;
::오피시에 – 1895년 12월 26일;
::코망되르 – 1903년 7월 11일;
::그랑 오피시에 – 1909년 7월 11일;
::그랑 크루아 – 1914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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